소녀는 눈을 잃는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을 흘려내 결국 말라버린 샘은 눈을 멀게 한다.
기대는, 사라진다.
남자는 다리를 잃는다. 들판을 자유롭게 뛰놀던 남자의 다리는 기괴하게 뒤틀려 망가진다.
생명은, 버려진다.
- 아무도… 들지 마라.
- 아무도 잠들지 마라.
허깨비 같은 외침은 부수어진 남자의 영혼처럼 흩어진다. 부수어진 소녀의 눈물처럼 깨져나간다. 부수어진 미래처럼 가슴을 찌른다.
잠든 희망은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하늘은 밝아온다. 물기 한 점 없는 공기는 모래가 되어 소녀의 폐부에 쌓인다. 기관지를 타고 내려온 먼지는 폐세포를 썩게 하고 소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스러진다.
회색 길바닥에 튀긴 피는 어째서 하염없이 붉은빛을 띠고 있는가. 말라붙은 피의 색은 어째서 정처 없는 감빛을 띄고 있는가.
둥, 둥. 저 멀리서 힘차게 북을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의 시간은 바쁘게 흘러간다. 흉악한 괴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모이지 않고 흉포한 황제는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잠들지 못하게 했다. 피로에 물든 군중은 황제의 기침 소리에도 벌벌 떨며 도전하지 않는 서로를 탓했다. 분열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몇 날 밤이 가도록 새로운 도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소녀가 눈물로 만든 웅덩이가, 호수가, 바다가 처참히 메말라버렸다는 이야기만이 입을 타고, 타고 전해져갔을 뿐.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았다. 기품 있던 남자의 모습을.
사람들은 기억하려 하였다. 갈가리 찢긴 남자의 모습을.
혈안이 되어, 광기에 절어 도전자를 찾는 황제를 밀어내기 위해 결코 사람들 앞으로 내보내지 않았던 공주를 위해 싸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간절한 염원을 위해 나서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어떤 성별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어떤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도.
분란이 일으킨 불신은 마음을 어지럽히고, 그것은 곧 내전으로 변질했다. 숙청당한 황제는 붉은 모란꽃을 피우며 죽어갔고 단도를 들고 두건을 쓴 사람들은 공주를 찾아 헤맸다. 아무리 찾아도 공주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권력의 중심을 그들이 잡기로 했다.
- 공주 같은 건 없어도 돼. 뭐가 문제란 말이야?
- 멍청한 것들, 왕을 죽이면 권력이 손안으로 떨어지는데 시련 따위가 알게 뭐지.
그러나 사공은 많았고, 배는 산을 향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너도나도 왕의 자리를 탐내며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고 수많은 왕들이 피의 모란을 토했다. 그렇게 공주의 나라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이들만이 이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며 세상을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혼란의 나라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일 년, 이 년, 삼 년.
백 년, 이백 년, 삼백 년.
왕의 부스러기가 지탱하던 나라는 간신히 이름만을 유지하다 무역의 번영으로 황정을 세웠다. 번창하는 나라는 다시 화려했던 옛날로 돌아갔다.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 불만을 품은 이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목적 있는 자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는다. 간절한 소원을 비는 누군가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들의 외침을, 황제는 들었다.
- 아무도, 잠들지 마라. 아무도 잠들지 마라!
도전자들이 모일 때까지 아무도 잠들지 마라!
가망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 이들은 있는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